지식 썸네일형 리스트형 시민생활과 법 국민이 국가 기관에 대하여 일정한 사항에 대한 의견이나 희망을 문서로써 진술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 유래는 국민의 국가에 대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이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거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며, 또는 침해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오늘날에는 참정권과 사법 제도가 권리로서 내실화되어 국민의 구체적인 생활상의 희망이나 애로 사항을 국회나 행정기관에 알림으로써 국정에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헌법 제26조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청원에 대하여 심사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여 청원권을 보장하고 있다. 공청회는 국민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사회 일반에 영향력이 큰 .. 더보기 신민회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최초의 부서는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을 양기탁이 맡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는 전덕기, 집행원은 안창호가 담당했다.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의 직책은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최근의 용어로 표현하면 조직부장과 같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더보기 나석주 일찌기 간도에 간너가 뤄쯔거우의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나석주는 황해도 겸이포에서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자 1920년 9월에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6년 톈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6년 6월에 톈진에서 유림대표 김창숙과 모의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할 계획을 세운 후 국내로 잠입했다.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면서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았는데 일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이 떨어지자 장렬하게 자결했다 더보기 대한국민의회와 문창범 제1차 세계대전 후 선생은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고자 1919년 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여 결성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3월 17일 오전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만 여명의 동포가 참여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개최하였다. 3․1운동 후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대한국민의회 해산결의를 선언하고 임시정부 통합운동에 동참하여 임시정부의 초대 교통총장(交通總長)으로 임명되었다. 선생은 취임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후 구체.. 더보기 유교 경영 호설암은 14억 중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숭배하는 부자이자 ‘장사의 신(神)’, ‘상성(商聖)’, ‘봉건 시대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라는 평가하는 인물로 경제 전반의 지혜와 경영 비결로 명성을 얻었다. 호설암은 북경의 동인당과 함께 중국의 2대 약국 중의 하나인 호경여당을 운영했다. 그 약국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기계(欺戒)’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절대 속이지 마라.”라는 의미의 글귀이다. 약국이란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므로 절대로 속임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벽에는 ‘진불이가(眞不二價)’, 즉 “정직한 물건에는 가격이 둘이 될 수 없다.”라는 말도 걸려 있다. 같은 물건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는 약속이다. 가격을 속이지 말라는 뜻이다. 태평천국의.. 더보기 맹자와 유교 맹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며, 하고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자 하지 말아야 하니,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주자는 “누구나 모두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되 …… 능히 이 마음을 돌이킨다면, 이른바 그 수오지심을 확충하여 의(義)를 이루 다 쓸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 말아야 할 것[不爲]’과 ‘하고자 하지 말아야 할 것[不欲]’은 바로 악(惡)을 말하고, 그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악(惡)을 하지 않고 선(善)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맹자에서 양심 개념은 의(義)를 지키는 절개와 통한다. 즉, 불위(不爲)와 불욕(不欲)의 드러남이 바로 절개이다. 맹자는 맹자는 의를 강조했다. “유하혜는 삼공으로도 그 절개를 바꾸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그가.. 더보기 동양의 양심관 주자는 맹자의 양심을 앞서 본 것처럼, 본연의 선한 마음이니, 이른바 인의지심(仁義之心)이라고 하고, 이를 평단지기(平旦之氣: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의 청명한 기운)와 연결한다. 맹자에서 양심은 인간으로서 지니게 되는 인간다움의 표상이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은 본질적으로 위태롭다. 그것은 노력으로 보존되는 것이지 변함없이 지켜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맹자는 우산지목(牛山之木)의 비유를 들어 양심의 속성을 설명한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아름다웠는데, 교외에 있어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 가니, 아름다울 수가 없다. 밤에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셔줘 싹이 나오지만, 소와 양마저 방목하니 황폐해졌다. 사람들이 황폐한 것만 보고 훌륭한 재목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하니, .. 더보기 록펠러 가문의 재산 1대 창업자 존D 록펠러의 재산은 1916년 10억달러로,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오늘날 기준으로 환산하면 300억달러였다. 1937년 사망할 당시 그의 재산은 국가경제생산의 1.5%를 차지했으며, 이를 오늘날 기준으로 바꾸면 3400억달러로, 빌게이츠 재산의 4배 규모다 ‘석유왕’ 존 D.록펠러와 그의 아들 존 주니어 록펠러는 미국 대공황이 한창이던 시절에 대담하게도 ‘30 록펠러 플라자’를 지었다. 그로부터 7대에 이른 록펠러 가문의 재산은 이 건물56층에 있는 상주직원 200명이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록펠러재단 본부는 흔히 ‘5600호실’로도 불린다. 록펠러재단은 2000년에 ‘30 록펠러 플라자’와 다른 록펠러센터 사무빌딩 9개를 매각했다. 이후에도 ‘5600호실’은 계속 임차해 썼다. 그로부터 1.. 더보기 조운제도 조운 제도는 고려 시대에도 운영되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태종은 경상도의 조세를 낙동강과 한강을 경유하여 운송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충주에 경원창을 설치하였다. 1465년(세조 11)에는 경원창을 인근의 가흥리로 옮겨 가흥창이라 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여 경상도 세곡은 물론, 충청도 지역의 세곡도 총괄하여 수납 운송케 하였다.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지대에 여러 조창을 설치하였다. 각 조창에서 수납된 세곡은 일정한 시기에 조운선에 실어 해운 또는 수운을 통해 한양의 남쪽 강변에 설치된 중앙 정부의 창고인 경창(京倉)으로 수송하였다. 해운을 통하여 한강 하류를 거슬러 온 충청·전라·황해도의 세곡은 서강변에 위치한 창고에, 수운을 통하여 한강 상류를 흘러 온 경상·강원·충북의 .. 더보기 천주실의 더보기 이전 1 ···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