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에는“오라 지방의 총관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고 변방의 경계를 조사한 결과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며 분수령 상에비를 세워 명기한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석이 세워질 당시에는 이 내용이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세월이 지난 뒤 20세기 초에 토문강이 어느 강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게 되면서 간도 지방에 대한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임의로 청에게 간도를 넘겨 주고, 그 대가로 만주 지역철도 부설권을 넘겨받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간도는 불모지에 가까웠고, 양국 모두 별로 욕심내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압록강과 두만강만 확보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 정도도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보다 많이 확보하는 것이므로 조선에 유익한 일이라고 여겼다.
국경 확정을 목적으로 청에서 파견된 사신 목극등은 강희제의 명령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수해 준 경위도 측정법에 따라 지도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목극등과 우리 측 대표가 저지른 잘못은 두만강에 대해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이 복류할 것이라고 단정 짓고 복류하는 부분에 돌로 경계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 뒤, 가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로서는 당초 목적보다 더 많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환영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강은 복류하지 않았고, 쑹화강과 연결되어 그 동쪽의 엄청난 영역이 우리 땅으로 포함될 가능성이 생겨 버렸다.
이것에 대해 당시 실무 담당자는 오류라고 중앙에 보고했지만, 중앙으로서는 실질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에 다시 청의 사신을 불러들여 이를 문제 삼을 이유가 없어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다시 문제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가 분계강이라고 부르는 강이 (관념적으로) 생겨났고, 이 강이 경계라고 믿어버리는 관습이 발생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중간에 두만강이 곧 토문강이라고 청에 확인해 주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월경 문제가 발생하자,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분계강 이남은 우리 땅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우리 정부도 이에 동조하여 다시 경계 분쟁이 발생하고, 2차례 양국 대표의 회동이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조선 대표는 두만강의 지류 가운데 가장 북쪽(홍천수강)으로 정하려고 노력하였고, 청은 가장 남쪽인 석을수로 주장하는 가운데 결렬된 것이다. 1909년 간도협약 때에 이권을 챙긴 일본은 그 강을 석을수로 인정해 버림으로써 사태를 종결지었다.
당초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우리 측 대표는 우리가 고려 때 윤관이
세운 비석은 훨씬 더 북쪽에 있었는데
거기까지 확보 못한 것을 오히려 아쉬워하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거기까지 나가지 못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결국 간도의 문제는 양국의 착오와 오해, 관념, 우리의 영토에 대한 희망 등이 뒤섞여 벌어진 분쟁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