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타임즈 썸네일형 리스트형 손정도 목사 손정도 목사는 만주의 안동, 길림을 비롯한 간도지방을 담당한 순회 전도자가 되어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2년 3월 5일 제5회 조선 예수교 감리회 연회 때도 손정도 목사를 만주 봉천북지방 할빈 남방에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는 기독교 애국지사들을 제거키 위한 가쯔라수상 암살음모사건 때문에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가쯔라(1849-1913)는 제1차 내각 때 영.일동맹을 맺고 노일전쟁을 강행해 을사보호조약을 맺게 한 한국인의 원수이며 제2차 내각때 한일합병을 강행했던 사람이다. 손정도 목사는 가쯔라 수상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일경의 요청을 받은러시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출옥 후에도 건강이 악화되었다. 경찰은 모의사실을 끝내 부인하는 손정도에게서 아무 협의를 캐지 못하고 풀.. 더보기 평양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 모펫 목사가 노방전도를 하다가 후에 회개하고 유명한 목사가 된 이기풍의 돌팔매에 맞아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조선초기선교사상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그는 1893년 평양에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를 세웠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칭되어 해방후 북한이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특히 조선인 조사들을 앞세워 평북지역에는 김관근, 평남지역에는 한석진, 황해도 지역에는 서상륜을 대표자로 임명하고 ‘팀웍’선교를 시행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다. 이 지역에 그가 직, 간접으로 세운 교회들이 수없이 많았다. 널다리골 교회 --- 장대현 교회의 모태 무엇보다도 모펫의 가장 큰 업적은 지도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교육에 힘 쓴 것이다. 더보기 고레스 칙령과 다니엘 바벨론 왕이 된 나보니더스(B.C. 556~539)가 메데의 세력을 막기 위해 바사와 동맹을 맺었다. 나보니더스 왕이 즉위한지 3년(B.C.559)후 동맹을 맺었던 바사 왕 캄비세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고레스가 왕이 된다. 고레스는 왕이 되자마자 주변의 여러 작은 왕국들을 병합하고, 9년(B.C.550)후 메데를 정복한다. 11년(B.C.539)후 티그리스 강의 오피스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둠으로서 바벨론을 쉽게 정복했다. 바벨론을 정복한 첫해에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렸다. 모든 유대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고레스 자신의 비용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 것이다. 바벨론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경제적인 원조를 할 것이며 느부갓네살이 빼앗은 성전의 금, 은그릇들을 돌려보내겠다. 유대인들은.. 더보기 한국 교회 1885년 우리나라가 구미제국과 수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가문호를 개방하였다. 외국인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어 개신교는 그 포교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1885년 미국 북장로 교회의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와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a)가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 주로 미국계 신교의 각 교파에 속하는 많은 선교사가 입국포교 하였다 더보기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의 교회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있는 교회. 박곡 교회는 1962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교단 분열로 인하여 갈라진 이후 1990년대 초반 합쳐지면서 현재까지 무교단으로 활동 하고 있다. 박곡 교회의 최초 설립일은 1906년 4월 20일로 보고 있지만 자세하지는 않다. 박곡 교회는 마을의 교회로 있다가 1950년대 후반, 교단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을 두고 문제가 생겼다. 이때 교인들 사이에 에큐메이컬 운동에 대한 이해가 서로 엇갈렸고, 결국 교회가 둘로 쪼개졌다. 1962년 교인들의 일부는 합동 측으로 갔고, 또 일부는 통합 측으로 가면서 갈라섰다. 그 후 양 교회의 장로들 중심으로 화합이 되었다가 교회가 다시 합쳐지면서 중립 노선을 취하였다. 더보기 대송교회 전신 19세기말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동학란이 일어나고 당파싸움이 벌어지고 친일파, 친러파로 갈리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곳 동해바다 영일만 대송면 넓은 들, 그리 크지 않는 괴동 마을에 살던 박군현氏는 청운의 뜻을 품고 바다 건너 일본에 가서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 복음을 접하며 일본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가 관찰한 결과 일본이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그 문화가 정착 된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복음의 씨앗을 고국으로 가져와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예배 드리기 시작한 것이 1901년 대송교회 전신인 괴동교회의 출발이었다. 더보기 YMCA회관 건립 질레트 선교사는 YMCA회관 건립을 위해 기금을 모금하고 종로회관을 건축했다. 그리고 1908년 12월 3일에 개관하여 종로 YMCA시대를 열었다. 강당과 체육실 등 3층 벽돌 양옥 회관을 준공했다. 이 회관은 실내체육 발전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체육실의 역할에 대하여 반하트 선교사는 1919년 9월 보고에서 “추운 겨울에도 쉼 없이 운동을 했다. 몇 해 전 만해도 신사들과 그 자제들은 운동경기를 천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일변하여 모든 신사들이 운동을 즐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YMCA의 공헌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연중 무휴로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은 YMCA 밖에 없다”고 했다. 질레트 선교사는 배재학당의 기독학생회를 학생 YMCA로 개편하엿다.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 민족 운.. 더보기 한기문 한기문은 기독교문화재 자료수집 및 보존·계승 활동을 전개하고 해설지도사도 양성해 나가기로 했다. 이와함께 정기간행물도 발간하면서 주요 교단과의 협력도 다각하게 모색할 계획에 있다. 또 기독교문화재의 문화재 신청에 대해서 지원활동을 하고 한국기독교문화재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사)한국기독교문화유산보존협회 (법인이사장:이태희 목사, 이하 한기문)는 12월 11일 서울 대치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회관에서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한기문은 기독교문화재 자료 조사와 수집 발굴 및 보존 계승을 목적으로 지난 2012년 11월 창립 발기인 총회를 가졌고, 지난해 7월 문화재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취득했다. 1월 설립감사예배를 드린데 이어, 이날 첫 번째 정기총회를 개최하게 됐다. 정기총회 현장을.. 더보기 초기 선교사 감리교회로 전향한 아펜셀러가 처음으로 언더우드를 만난 것은 커넷티컷에서 열린 “신학교연합회”에서 였다. 그는 이 학회에서 눈에 띄게 활약하는 총명한 청년 언더우드를 잊을 길이 없었고, 그후 그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선교의 동역자로 운명을 같이 하였다. 아펜셀러는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벽안의 땅에 와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였다. 미국의 남장로교회가 선교사를 한국에 계속해서 파송하기로 한 것은 언더우드선교사가 네쉬빌에서 열린 신학교 협의회에서 행한 열정적인 설교와 선교보고를 들은 교단의 외국선교부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선교부의 실행위원회는 1891년 12월 세 명의 청년의 한국행을 승인하고, 4명의 여자도 함께 한국으로 나갈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1892년에.. 더보기 베어드 선교사 윌리엄 M 베어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지역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평양에서는 장로교 최초로 숭실대학을 설립한 윌리엄 M. 베어드는 1891년 2월 1일 인천에 도착하여 그해 9월부터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1895년에는 대구로 옮겨 대구제일교회와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하고, 1896년 서울로 옮겨 경신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97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한 후 1906년 9월 감리교와 연합하여 숭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근로와 자조정신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 교육에 전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네비어스 선교방법을 한국실정에 맞게 적용하여 자립, 자치, 자족에 기초한 선교 정책을 입안하였다. 숭실대학장을 사임한 후에는 교재 발간 등의 문서선교에 ..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