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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한국의 불교 철학

 

고려 지눌의 철학은  남종과 북종을 하나로 합친 것이며, 그 위에 다시 교종을 합친 것이다.

 

지눌은 부처가 입으로 전한 것이이고 마음으로 전한 것이인데, 석가의 마음을 통한 가르침과 입을 통한 가르침이 다른 것이 아니므로 교종과 선종을 합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부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경전은 배의 방향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조계종이 그 바탕은 선종이면서도 경전을 중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지눌의 철학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철학은 의천과 마찬가지로 원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눌은 항상 원효를 높였으며 자기주장의 중요한 대목마다 원효의 설명을 인용하곤 했다. 이처럼 원효의 합침의 철학은 지눌에게도 이어진다.

  지눌은 이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라고 하였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참답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그리고 이 같은 참지혜로 사물을 볼 때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분별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30년 전에 보던 산은 집착을 하고 보던 산이고, 이제 보는 산은 집착 없이 보는 산이다. 우리가 집착을 가지고 보면 저 산은 싫고 이 산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집착 없는 눈에는 이 산은 이 산일 뿐이고 저 산은 저 산일뿐이며, 이 물은 이 물일 뿐이고 저 물은 저 물일 뿐이다. 그래서 성철은 그다음 해 부처님 오신 날 법어로학교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공장에서 일하는 부처님들, 교회에서 기도하는 부처님들…….”이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사물을 대하든지라는 존재의 입장을 버리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하자.

 

 

그 일은 민족 또는 우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때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진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은 자신을 버릴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지눌은 분별을 버리면 나와 남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고, 그때 남을 위하는 일이

 

 바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 된다고 하였다.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버리고 보아야 사물의 참모습을 구분해 볼 수 있는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눈을 혜안(慧眼)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승려들은 어려운 고비마다 무기를 들고 나왔다. 고려 때 거란과 싸운 일이나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운 일이 모두 그러하다.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를 발표한 적이 있다.

 사실 이 법어는 중국 선승의 이야기를 되살린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중국의 한 승려가 처음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산이 보였고, 승려가 되어 세상 모든 것에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라는 가르침을 들으면서 산이 안 보였는데, 30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나니 다시 산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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