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는 정세가 매우 혼란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무신 정권 몰락 후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무너졌고, 대외적으로는 홍건적과 왜구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백성들은 큰 고통에 시달렸다. 이러한 시기에 최무선의 화약 제조는 왜구 등 이민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화약 제조법은 중국에서 특급 비밀이었기 때문에 고려 자체에서 제작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공민왕은 명에 요청하여 염초 50만 근, 유황 10만 근과 그 밖에 필요한 약품을 얻어왔는데, 이는 화약 제조 기술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최무선은 중국인 이원에게 화약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인 염초 제조 기술을 배워 마침내 화약 제조법을 완전히 알아내게 되었다.(이와 다른 의견도 있으나 최무선이 염초, 즉 질산칼륨을 흙에서 추출하는 기술을 실험적인 방법으로 알아낸 것은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우왕 3년(1377)에 화약 제조를 위한 국가 기관으로서 화통도감을 발족하였다.
화통도감을 설치한 후
화약과 각종 화기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20여 종의 화기가 제조되었고,
화기 발사 전문 부대인 화통방사군도 편성되었다.
이는 우왕 6년에 있었던 전라도 진포(鎭浦) 싸움과 진도(珍島)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하는 바탕이 되었다.
고려 말에 제조된 초기의 화포는
그 목적이 탄환을 쏴 적을 죽이거나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불화살을 발사하여
목표물을 불태우는 화공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화약의 발사력이 약해 탄환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발사물에는 주로 활화살이 사용되었고, 그 다음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철탄환이 사용될 수 있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대장군, 이장군, 화통(火㷁),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 철탄자 등 18종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화포와 화통 등의 총통과 화전과 전 등의 발사물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고려 말 화기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다만 철탄자는 여말 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총(銃)이나 전(箭) 등은 소형 화기이고, 통(㷁)은 중형, 포(砲)는 중화기에 속하는 것이다.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은 크기에 따른 것으로 대장군포는 11척 9촌의 대형 화살을 사용하는 중화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