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에는 나석주가 경성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다.
일찌기 간도에 간너가 뤄쯔거우의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나석주는 황해도 겸이포에서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자 1920년 9월에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6년 톈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6년 6월에 톈진에서 유림대표 김창숙과 모의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할 계획을 세운 후 국내로 잠입했다.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면서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았는데 일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이 떨어지자 장렬하게 자결했다
1922년 중국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한 김지섭은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고 이후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가 일어나 한국인 학살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일본으로 갔다.
1924년 초 일본 동경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의 기회로 삼으며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경으로 가던 중,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일본 궁성에 투탄하기로 결정하였다.
1월에 황성 정문에 접근하여 호위경관이 저지하자 폭탄 한 개를 던지고 재빨리 궁성 쪽으로 달려갔는데 호위경관들이 달려오자 나머지 폭탄을 던지고 붙잡혔다.
1925년 8월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28년에 옥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