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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고려의 관청수공업과 대외교류

 

관청 수공업은 중앙 관청 수공업과 지방 관청 수공업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개경의 중앙 관청에서 조직·운영하던 수공업장으로 창, , 갑옷 등의 군수품 및 국가 행사에 필요한 물품, 그리고 왕실이나 귀족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필수품과 사치품을 생산하였다. 후자는 금기방, 잡직방, 갑방 등과 같이 중앙 관청에서 제공할 공물을 위한 것과 지방 관청 자체의 수요를 위한 것 등 두 종류의 물품을 생산하였다. 공조는 수공업과 관련된 최고의 행정 기관으로 공장(工匠)을 통제하며 토목 건축과 관련된 일을 맡는 기능을 하였다. 관청 수공업은 업종별로 분업이 실시되었는데, 갑옷의 경우 피장에서는 가죽을 이기고 피갑장이나 백갑장에서는 그것으로 갑옷을 제작하였다.

상층의 관청 수공업자들이 1년에 300일 이상 근무하였을 경우, 고려 정부는 이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공장별사를 지급하였다. 이는 작업의 중요성에 따라 차등 있게 쌀을 지급한 것이었다. 일반 수공업자에게도 일정 정도의 반대급부가 주어지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였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요··일본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하였다. 그 중 가장 활발했던 나라는 송으로 공식적인 조공 무역 이외에 사무역도 성하여 고려에 온 송 상인은 고려 측의 기록만 보더라도 5,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요·금과는 사행 무역(使行貿易)이 행해지고 호시장(互市場)이 설치되기도 했지만, 전쟁 등 긴장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교역에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도 정식적인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민간 상인들이 내항하여 방물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가는 진봉 무역(進奉貿易)이 조금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대식국(大食國), 즉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과 고려의 무역에 자극받아 고려에 오기도 하였다. 현종 15(1024)에 처음 온 것으로 기록되는데, 이때 열리자 등 100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친 것으로 나온다. 이듬해 9월에도 하선라자 등 100여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의종 6(1040) 11월에는 보방개 등이 와서 수은, 용치(龍齒, 해마치의 화석으로 정신 안정·강화 작용을 가진 희귀한 약재), 점성향(占城香,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생산되는 향료), 몰약(沒藥, 홍해 연안에서 나는 관목의 나무껍질에서 생기는 흑색유집(黑色乳什)의 몰약지(沒藥脂)), 대소목(大蘇木, 붉은 색을 내기 위한 염료나 약재로 쓰는 다목의 붉은 속살) 등을 바치니, 고려에서도 금과 포를 후하게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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