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음전
공음전, 한인전과 녹봉제
문종 3년(1049)에 공음이 있는 귀족 관료에게 그들의 특권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급해 준 토지이다. 수급 대상자를 5개의 ‘품(品)’으로 구분하여 최고 1품 전 25결·시 15결부터 최하 5품 전 15결·시 5결을 지급하였다. 산직자에게도 원래 액수에서 전·시 각각 5결씩 감하여 지급하도록 하였다. 공음전에서 5개의 ‘품’은 일반적으로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만을 상대로 한 우대 제도였다는 것이 정설로 통용되고 있다.
공음전은 관인 신분의 계승과 거기에 따른 경제적 조건을 보강해 주는 성격을 가진 토지로 아버지에서 아들, 다시 손자에게 물려줄 수 있었고, 범죄자의 경우도 사직을 위태롭게 하거나 모반, 대역, 제명이 아니면 비록 아들은 죄과 있더라도 손자가 무죄이면 원액의 3분의 1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중기 이후에는 공음전에 대한 관리가 약화되면서 국가에 고해 자격 여부를 인정받은 후 물려주던 방식이 점차 없어지고 자유로이 세전(世傳)할 수 있었다. 지급하던 방식도 종전에 수조권을 분급하던 것에서 사패전(賜牌田)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한인전에서 한인은 실직이 없어 동정직을 제수 받아 처음부터 산직 체계 속에 대기해 있는 관인을 말한다. 이들은 초기 지방 세력의 흡수 및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형성된 한 무리의 관인층으로 과거나 음서 등을 통해 동정직에 처음 임명되어 관인층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실직에 임명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구체적인 관직이 없는 관인, 즉 한인으로 규정되어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인 한인전 17결을 분급받았던 것이다. 공음전과 마찬가지로 원칙상 세습되었고, 한인의 자제로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결혼하지 못한 자에게 지급된 한인 구분전과는 구별된다.
고려의 관리들이 직역에 대한 보수로 전시과 등의 토지와 더불어 현물인 미곡(米穀)을 급여 받은 것이다. 녹봉제는 문종 30년(1076)에 비주록(妃主祿), 종실록(宗室祿), 문무반록(文武班祿), 권무관록(權務官祿), 동궁관록(東宮官祿), 서경관록(西京官祿), 외관록(外官祿), 잡별사(雜別賜), 제아문공장별사(諸衙門工匠別賜)의 9개 항목으로 정비되었다. 문무백관을 비롯하여 후비, 종실과 서리, 공장 등 여러 계층에 지급하였고, 예종 대에 주진장상(州鎭將相)·장교록(將校祿) 규정이 추가되었다. 인종 대 전면적인 재편과 더불어 치사관록(致仕官祿)도 새로이 제정되었다.
문무반록의 경우, 최대 1과 400석(중서령, 상서령, 문하시중)에서 47과 10석(국학학정, 국학학록, 도염승)까지 모두 47과 등으로 나누었으나 인종 대 28과 등으로 조정되었다. 그렇지만 전시과의 18과보다 세분화된 것으로, 이는 각 관직의 중요도에 따라 지급액도 차등을 둔 것으로 보인다.
녹봉은 조세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담당 기관은 좌창(左倉)으로 세입미 139,736석 13두를 가지고 각 과등에 따라 지급했다고 한다(“고려사” 식화지 녹봉조). 고려 말의 기록에 따르면 녹봉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약 10만 결의 토지가 필요했다고 전한다. 녹봉은 현직·실직주의에 입각하여 지급되었으나 산직에도 지급한 것으로 보이는 사료도 있어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